오늘날 한국의 종가(宗家)들은 지역사회를 향해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한다. 문틈으로 보이던 집안 풍경을 훔쳐내던 예전과는 달리 종가를 찾는 사람들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방문객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가서며 즐기고 만끽한다. 해남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종가들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친족집단을 통합하는 중심일 뿐 아니라 지역주민 나아가 국내외를 향한 열린 문화공간을 희망하는 한국학 전문 아카이브로서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녹우당은 해남 백련동에 있다. 조선시대 남인의 중심세력인 고산 윤선도의 세거지이다. 윤선도는 거부의 가문을 형성했지만, 언제나 부당한 권력에 맞섰으며 16년의 유배생활을 할 정도로 양심적 선비였다. 이후 녹우당은 그의 증손 공재 윤두서와 공재의 아들 낙서 윤덕희, 손자인 청고 윤용 등에 걸치는 3대의 예술적 재능의 산실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쟁쟁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이고 머물렀던 이른바 살롱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공재의 외증손으로 강진 유배시절 실학을 완성한다. 그는 유배생활 내내 외가인 녹우당 사람들과 교류하였으며 수많은 서적을 탐닉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 그리고 진도 출신의 소치 허유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녹우당을 드나들었다. 말하자면 녹우당파였던 셈이다. 특히 소치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녹우당을 찾아 공재화첩을 빌려보면서 며칠 동안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격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녹우당은 엄격한 유교적인 가풍을 견지하였으면서도 이에 얽매이지 않고 다산으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등 선진학문이나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녹우당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0점 등을 비롯한 문집과 글씨, 그림 등 4600여 점의 조선시대 명품과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단일 가문으로서 녹우당의 소장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다. 특히 어느 것 하나 선조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대를 이어 생산된 자체 컬렉션이라는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가운데에는 단가문학의 최고봉인 고산의 어부사시사가 실린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보물 482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 해남윤씨 가전고화첩(보물 481호), 그리고 신윤복의 작품과 비견되는 윤용의 미인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엄청난 분량의 이 자료들이 오늘날까지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종가의 가훈인 ‘적선’과 ‘근검’의 가풍을 이어가려는 노력, 즉 선조의 품격을 전세하려는 의지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녹우당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작품이 많다거나 보관이 잘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고 다양한 작품의 수장처로서도 중요한 문화적 의미가 있지만, 이를 공개함으로써 자유로운 관람과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더욱 중요한 인문학적 의미를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녹우당의 변화를 견인하는 콘셉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50여 점이 알기 쉽게 놓인 전시관은 이미 해남 백련동, 아름다운 전원마을의 열린 문화센터로 기능을 한다. 전문가나 비전문가를 가릴 것 없이 전시관은 찾는 이들에게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다. 전시관은 녹우당의 의미를 한층 생생하게 살려내는 공간인 셈이다. 더불어 전시관을 해남군이 마련하고 운영한다는 것도 신선한 발상이다. 말하자면 녹우당은 작품전시나 관람을 빌미로 한 모든 재정적인 관계와 초연하다.

녹우당이 자칫 종가의 위엄을 깎아낼지도 모른다는 일부의 우려와 달리 소통의 구심점으로 변화되기까지에는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79) 선생의 노력이 컸다. 가문의 실용정신을 계승한 선생은 연세대 영문과 출신으로 한동안 외국계 회사에 근무했지만, 부친(윤영선, 1904∼1997)의 뒤를 이어 녹우당을 맡았다. 녹우당의 자료가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최근 녹우당 인근에 새로이 농촌체험을 위한 한옥을 짓고, 주변에는 차밭을 일궈놓았다. 아직 한국의 종가들이 생존을 모색할 만큼 경쟁적이진 않지만, 지금은 호텔이 된 유럽의 아름다운 중세의 성채를 기억하면서, 언젠가는 현실적으로 대두될지도 모를 녹우당을 대비한 해답을 떠올렸다. “게으르면 종손하기도 힘들다”는 그가 녹우당의 가치를 일신한다.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장·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