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처럼 들고 다니다 펴면 이동식 주택이 만들어지고, 소형 가방을 열면 어디서든 탁자, 의자가 있는 거실이 생긴다. 스위치 하나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해변가로, 피톤치드향이 가득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숲 속으로, 집 창 밖 풍경이 바뀐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미래에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주택 풍경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방 2~3개, 거실 하나짜리 성냥갑 아파트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앞으로는 소비자 기호를 고려하지 않은 천편일률적인 주거상품이 서서히 사라질 전망이다. 아파트를 벗어나 한옥, 모듈러 주택, 미니하우스 등을 기호에 따라 고르고, 내부 공간도 내 맘대로 꾸밀 수 있다. 매경이코노미는 우리나라 주거문화가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는지 짚어보고, 미래 주거문화 트렌드를 예측해봤다.
집이 달라진다 카멜레온식 평면 늘고 방범로봇도 등장
우리나라 인구구조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고령, 독신가구가 늘면서 1인 가구 수가 4인 가구 수를 넘어섰고 700만명 베이비부머가 은퇴를 시작했으며, 국내 체류 외국인이 어느새 100만명을 돌파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주거 트렌드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 아파트 인기는 갈수록 치솟아 우리나라 주거상품 중 아파트 비중은 어느새 58%(2010년 기준)에 달한다. 일상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주거는 시대 문화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1. 시대별 주거문화 변천
우리나라 주거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조선 시대까지는 한옥이 주를 이뤘으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많은 변화를 겪는다.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 후 한국에 외국 주거문화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상류층에서는 한옥 일부를 개조해 서양식을 가미하거나 서양 가구로 실내를 꾸미곤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에서 유행했던 일양(日洋)절충식 주택이 한국에 유입됐다. 외부인을 맞이하는 응접 공간은 서양식으로 하고 실제 생활이 이뤄지는 주거 공간은 다다미 등 전통적인 일본 주거 공간을 따르는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주로 도시 지역에 국한됐다. 농촌 주택들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흙과 돌로 담을 쌓고 짚단으로 지붕을 엮은 초가집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주택이 많이 파괴된 1950년대는 서울 인구 증가율이 연평균 8%를 넘을 정도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주택이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에 따라 정부 주도로 공영 표준형 주택이 많이 건설됐는데 최소한의 면적에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된 주택 유형은 목조한옥이었다.
1962년 최초 단지형 아파트 선보여
태양광을 활용한 ‘온라인 뮤직파고라’. 기존의 벤치 기능만 제공하는 파고라와는 달리 사람이 접근할 경우 센서가 작동해 조명이 켜지고 온라인으로 음악이 제공되는 첨단 시스템이다.
1960년대에는 시멘트와 벽돌, 철조콘크리트를 사용하는 양옥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우리나라 최초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를 지었다. 이후 아파트는 반세기 넘게 우리나라 대표 건축물로 자리 잡는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아파트는 더욱 빠르게 보급됐다.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5층 건물이 무너져 입주민과 인부 수십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지만 아파트 건축 열기를 꺾지는 못했다. 1971년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총 1583가구의 대규모 단지인 시범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단지는 중앙공급난방 방식을 채택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12층 아파트로 고층 아파트 시대의 본격 개막을 예고했다.
1970년대는 서울 강남 아파트 전성시대가 열린 시기이기도 했다. 51·55평형의 한강맨션은 당시 최고의 평수로 중산층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파트가 중산층 주거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한강맨션의 성공적 분양은 민간업체들이 아파트 시장에 진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반포아파트는 대규모 단지 최초로 온수 공급과 지역난방 시스템이 도입됐고 부동산 투기가 극심해져 ‘복부인’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돌았다. 또 이 시기에는 발코니를 설계할 때 고층이 주는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발코니를 전면으로 끌어내는 등의 구조적 변화도 진행됐다. 난방 형태는 온돌에서 보일러로 바뀌었으며 입식화가 나타났다.
1970~1980년대 강남 시대 열려
신혼부부용(안방을 크게 만들어 방 2개, 거실 구성)
자녀 있는 가족용(안방을 나눠 방 3개, 거실 구성)
은퇴한 노부부용(거실 넓히고 방을 2개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획일적인 공영주택 대신 민간 단독주택이 전국에 광범위하게 지어진다. 작은 정원에 잔디와 나무를 심어 가꾸고, 거실 아래 지하실을 두고 폭 60㎝ 정도의 발코니를 둔 전형적인 단독주택이 유행한다. 단독주택의 2층화 경향과 함께 대지 내 건물의 몸집이 커지면서 주인집과 임대 가구가 같은 건물에 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대문과 현관문, 화장실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사생활 보장 욕구가 강해지면서 각 층마다 따로 쓰게 된다. 이는 1980년대 다세대·다가구 주택의 원형으로 자리 잡는다.
1980년대 들어 아파트 붐은 더욱 커졌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부동산 투자 열기도 높아졌다. 특히 높은 교육열은 학군이 좋은 강남 지역의 부동산 가치를 띄우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아파트 붐의 발원지로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남 아파트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고 주변 상권과 인프라가 발달하면서 ‘부촌’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또 이 당시의 아파트 건설은 종종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기도 했다. 주택난을 겪던 시민들의 민심을 잡기 위한 공약 덕분에 곳곳에 아파트 밀집지가 탄생하게 된 것. 공동주택 공급이 늘고 신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남영우 나사렛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1970년대는 5층 주공아파트가 대부분이었으나 1980년대 들어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미분양이 없을 만큼 대기 수요가 많았던 데다 분양가도 상한이 있어 건설사들이 건축비를 많이 들여 아파트를 차별화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마을 단위로 개발되고 미분양도 발생하자 아파트 외관에 라운딩이 생기고 조경을 강조하는 식으로 조금씩 고급화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고층 주상복합 인기
2000년대 들어 아파트는 이제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단지 내에서 여가도 즐길 수 있는 생활공간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사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아파트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파트 외관이나 내부 구조가 건설사마다 비슷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남기업, 한양, 풍림산업, 우성건설 같은 중견 주택전문기업이 대기업 계열 건설사보다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강남구 도곡동에 66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가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바뀌었다. 고급 아파트 대명사로 인기를 끌면서 하이페리온, 아크로비스타 등 고급 주상복합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이에 질세라 일반 아파트도 고급 브랜드를 달고 품질 강화에 나섰다.
이때부터 첨단 IT 기술이 반영된 미래형 주택이 부유층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홈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외부에서 집 안의 각종 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아파트’가 대표적 예다. 고유가 현상으로 에너지 절감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태양광 집열기나 풍력 발전기를 설치해 에너지를 자급하는 ‘자가발전주택’도 개발됐다.
아파트의 고급화 경향에는 삶의 질을 높이려는 웰빙(well-being) 트렌드도 한몫했다. 건설사들은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아파트의 고급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아파트를 브랜드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파크(park), 그린(green), 리버(river), 파인(fine), 힐(hill) 등의 웰빙식 이름이 들어간 아파트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다만 아파트의 고급화는 부작용도 불러왔다. 먼저 고분양가 논란이 심했다. 1998년 실시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와 세계적인 유동성 증가로 2000년대 중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이는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이어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정부는 분양가상한제, 종합부동산세, 총부채상환비율(DTI)·주택담보대출비율(LTV) 제한 등 각종 부동산 대책을 내놓으며 집값 안정을 위해 진땀을 뺐다. 서울시 장기전세주택인 시프트(Shift)와 개발제한구역을 활용해 원가를 낮춘 보금자리주택이 보급되면서 ‘실거주’라는 주택 본연의 목적이 강조됐다. 여기에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며 집값은 대세 하락기에 접어들었다.
2. 잇따르는 최첨단 아파트들
요즘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 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그만큼 색다른 평면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침실 수가 줄어드는가 하면 베이(Bay)가 늘어나고 가변형 카멜레온 평면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때 고층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지만 점차 저층 아파트가 특화되고 한옥의 전통미를 접목한 아파트도 줄줄이 나타날 전망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침실 수 축소와 베이 증가다. 1990년대 초만 해도 50~60평형대는 5침실, 2욕실 또는 5침실, 1가사실, 2욕실이 기본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들어 50~60평형대는 4침실, 2욕실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줄어든 침실 공간을 거실, 주방, 드레스룸이 차지했다. 최근에는 40평형대에도 2침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베이는 벽의 기둥과 기둥 사이 구획으로 보통 발코니 쪽에서 아파트 내부 평면을 봤을 때 안방, 거실, 작은방 등으로 나눠지는 것을 일컫는다. 베이가 많아질수록 전체 평면은 납작한 직사각형 형태가 된다. 남향 또는 전망이 좋은 쪽에 접하는 면적을 늘리기 위해 전면 폭이 넓어지면서 베이가 증가한다. 요즘 아파트들은 2베이, 3베이, 4베이로 진화하고 있다. 대개 집 크기가 작을수록 베이도 적어지지만 최근에는 2~3베이가 많았던 전용 60㎡ 아파트가 4베이로 구성되기도 한다.
이뿐 아니다. 가족 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아파트 실내 공간을 간단한 공사로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식 평면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신혼 육아기에는 방 2개와 넓은 거실로, 자녀 학령기 이후에는 방 3개로, 자녀 출가 이후 은퇴기에는 다시 방 2개와 넓은 거실을 사용한다. 별도로 서재, 음악·영화감상실 등을 만들어 사용하는 등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주거 공간도 연출할 수 있다. 가변형 아파트는 외벽, 가구 간 경계벽을 제외한 가구 내부 구조벽을 거의 없애고 경량벽체로 시공해 가변성능을 높인 구조다. 계약 시 고객 선택에 따라 침실을 2개로 만들고 거실을 넓게 하거나, 침실을 3개로 만들어 각각 아이들 방을 만드는 등 고객 맞춤형으로 주거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파트에 다양한 기능이 접목되고 있는 것도 트렌드다.
동부건설이 인천에 분양한 ‘계양 센트레빌’은 국내 최초 ‘범죄예방 디자인(CPTED)’ 인증을 받은 아파트다. 아파트 단지와 내부 설계를 할 때부터 범죄예방, 안전 분야를 특화했다. 동부건설은 아파트 단지에 방범로봇 ‘센트리’도 설치했다. 이 로봇에는 3개의 카메라 렌즈가 부착돼 반경 50m를 360도로 회전하면서 감시할 수 있다.
유비쿼터스 아파트를 구현한 단지도 늘었다.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아파트에서는 IT 컨버전스 보안 시스템을 통해 입주자들이 지하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면 입주자의 주차 위치와 입주자 동선에 따라 조명이 켜진다. 자동 호출된 엘리베이터를 통해 공동현관에 UKS(Ubiquitous Keyless System)가 작동해 스마트키만으로 단지 출입문과 가구 내 현관을 자동으로 열고 들어갈 수 있다. U-보안 스위치를 한 번 만지면 보안 설정, 절전, 일괄 소등, 조명 차단, 보일러 설정, 가스 차단 등이 가능하다.
해외 주거문화 살펴보니
프랑스 원룸, 다락방을 침실로 활용
경기 남양주 진접센트레빌에 설치된 방범로봇 센트리. 적외선 감지장치를 통한 자동촬영과 경고 메시지 기능을 탑재한 첨단 방범장치다.
아파트 중심인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은 저밀도 단독주택 중심의 주거문화가 형성돼 있다. 고령화, 핵가족화, 도시 발전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공간 설계에서 우리나라와의 공통점도 엿보인다.
일본에서는 수도권 신도시로 몰려갔다가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는 ‘도심 회귀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도심의 좁은 공간에 공간 활용도를 높인 설계가 인기다. 2007년부터 베이비부머가 은퇴해 본격적인 고령 사회에 접어들면서 노년층 ‘TONK(Two Only No Kids·자녀에게 부양받기를 거부하고 부부끼리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노인세대)족’에 맞는 평면도 발달해왔다. 일본 TONK족을 위한 평면은 독립적인 공간 배치가 돋보이고 부부가 2개 침실을 이용하는 것이 이채롭다.
집값이 비싼 유럽에서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초소형 임대주택들이 발달했다. 프랑스 파리의 초소형 임대주택을 보면 싱글이나 ‘DINK(Double Income No Kids·자녀 없이 사는 부부)족’ 등 핵가족을 위한 소형 주거상품이 많다. 원룸 형태에 침실을 다락방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소형주택이라도 가구별 구조와 인테리어가 천차만별이다.
미국은 교외 저밀도 단독주택과 도심 초고층 밀집 주거의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캘리포니아 타운하우스는 쾌적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개발된 대규모 고급 주택단지다. 맨해튼 도심의 고급 맨션은 우리나라 고급 주상복합과 비슷한 구조다.
[취재 : 김경민·노승욱 기자]
